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문단 편집) ==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차우셰스쿠]] 체제의 완성 == 루마니아에서는 1965년 3월에 게오르기우데지가 죽고 당 제1서기의 후임에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șescu)가, 국가 평의회 의장의 후임에는 키부 스토이카(Chivu Stoica)가 각각 취임했다. 그중에서도 차우셰스쿠는 게오르기우데지에게 신임을 받아 1954년에 당 서기에, 다음 해에 정치국원에 임용되고, 수년 동안 당 조직 문제의 책임자로서 지위를 견고히 해 온 인물이었다. 그는 독자적 경제 건설, 민족주의적 입장, 신중한 민주화라는 '게오르기우데지 노선'을 계승하면서, 당내와 외교의 양면에서 이것을 더욱 발전시켜 차우셰스쿠 노선을 확립했다. 같은 해 7월에 노동자당 제14차 대회(당명을 공산당으로 고치고 대회도 공산당 제9차 대회라고 함.)가 개최되고, 직명을 제1서기에서 서기장으로 바꾼 차우세스쿠는 "공업화야말로 독립과 국가 주권을 보증하는 결정적 요소이다." 라고 강조했다. 대회에서 승인받은 신헌법은 국명을 인민 공화국에서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고치는 것 외에, 전후 해방 시기에 소련의 역할을 강조한 헌법 전문(前文)을 모두 삭제하고, 1964년의 당 성명의 기조를 채택하였다. 이것은 8월 20일에 대국민 의회에서 채택되고 발표되었다. 또, 이 대회는 국민 총생산을 연평균 10.5% 성장시킨다는 야심적인 신 5개년 계획(1966∼1970)을 채택했다. 1970년대 루마니아의 산업 구조는 큰 변화를 계속하여 전체 근로자 중 농업 종사자의 비율은 1950년의 74.1%에서 1970년에는 49.1%로, 그리고 1973년에는 42%로 감소했다. 또, 1965년 이후에 일찍이 숙청된 사람들의 명예 회복이 시작되고, 1967년 말에는 정치범의 특사가 있었다. 그러나 루마니아는 외교적으로 자주 노선을 채택하면서 소련으로부터의 간섭을 탈피해 왔으나, 국내적으로 민중의 정치적 자유를 헝가리의 경우처럼 대담하게 확대하는 방향으로는 채택하지 않고, 매사에 당의 지도성을 강화하였다. 루마니아 공산당은 다른 동유럽 국가에 비교해서 늦게 시작한 경제 개혁을 1967년 12월에 전국 회의에서 전면적으로 실시할 것을 결의하고, 기업의 독립 채산제와 기업 간의 직접 계약을 확대하였다. 주목할 만한 것은 당 대회가 당과 정부 기관의 일원화를 결정한 것이다. 차우셰스쿠 당 서기장이 국가 원수를 겸임한 것 외에 각종 수준에서 당 기관과 국가 기관과의 합병이 계속 진행되었다. 이 조치는 행정의 능률화를 꾀하고, 동시에 당 독점권을 더욱 철저하게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